얼마전 한국에 전국적으로 첫 눈이 왔다. 자고 일어났더니 하얀 세상에 괜시리 마음이 따뜻해져 배시시 웃었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옴짝달싹 못 하고 심지어 사우나나 목욕탕 방문도 힘든 일년을 보낸 지금은 너무 먼 옛날 이야기같이 들리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울이 다가오면 으례 온천 여행을 가야겠구나 생각했었다.
겨울에만 즐길 수 있는 많은 액티비티와 풍경이 있겠지만, 한동안 내 마음을 사로 잡았던 건 '야외에서 눈을 바라보거나 맞으면서 노천 온천을 즐기는 유키미부로(雪見風呂, 설견풍여)' 여행이었다. 한국에 눈이 오지 않는 건 아니지만, 노천 온천을 할 만한 곳이 흔치 않았던 지라, 처음 그 로망을 실현했던 곳은 일본 홋카이도였다.
원래 계획했던 삿포로를 관광하는 일정에 온천을 추가한 거라 개인 욕실이 있는 료칸 대신 대욕장을 이용하기로 했다. 삿포로시 근처에도 좋은 온천지들이 있었지만, 조금 특이한 곳에 가고 싶어서 알아본 곳이 삿포로에서 버스 타고 약 1시간 거리의 치토세(Chitose)에 위치한 "마루코마 료칸(Marukoma Onsen Ryokan)"이었다.
이 료칸의 온천은 시코쿠 호수(Lake Shikotsu)와 접해있는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욕장과 호수와 산을 바라볼 수 있는 노천 온천도 있지만, 호숫가 바로 옆에 호수 바닥에서 올라오는 온천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돌담으로 호수와 구분을 지어 만들어 놓은 노천 온천도 있다. 일본에서도 20여군데 밖에 없는 자연 온천이라길래 이게 궁금해서 굳이 치토세를 찾아갔었다. 자연 온천이라라더니 온천탕의 높낮이는 호수 수면 높이와 비슷해서 1년동안 시기에 따라 계속 변한다. 그래서인지 공식 홈페이지에 가면 현재 온천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 설명해놓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겨울에는 수면 높이가 낮아진다.
대욕장과 붙어있는 노천 온천과 달리 호숫가 있는 노천 온천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야외다. 물론 길이 나 있긴 하지만 야외라서 혹시나 누가 지켜보지 않을까 살짝 당황스럽다. 그래도 이 산골짜기에 누가 굳이 오겠는가 싶은 마음에 용기를 갖고 후다닥 호숫가로 다가갔다. 짧은 길이었지만 겨울의 추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바람이 불었다. 그런 숲길을 거쳐 온천에 몸을 담그면 머리는 차갑지만 몸은 뜨끈한 온천의 정석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생각해보니 노천 온천도 어찌보면 호수에 몸을 담그는 건데 일단 몸을 담그고 나면 걱정이 덜 되는 건 왜일까). 그리고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면 내 앞의 호수는 얼어있고 산과 들판엔 하얗게 눈이 쌓여있다. 물아일체(物我一體)랄까. 노천 온천에서 자연을 바라보며 자연이 준 것을 누리다보면 자연에 좀 더 집중하게 된다.
실내 욕탕 안에는 카메라를 들고 갈 수 없어서 안타깝게도 사진은 남기지 못했는데 (그리고 거의 항상 사람이 있다) 일부 개념없는 중국인들이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어찌나 찍어대던지, 눈살이 찌푸려졌었다. 그렇다고 나도 똑같이 매너없이 굴고 싶진 않아서 욕탕 사진은 남기지 않았다. 다만 아침에 개장 전에 홀로 노천 온천에 갈 때 미리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몇장 남겼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계절 사진은 홈페이지 사진을 들고 왔다. 이렇게 호수 옆에서 바라본 풍경도 좋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좋았기에 사진이 없는 게 조금 아쉬울 만도 하지만 그래도 그냥 눈으로, 마음으로 시코쿠 호수와 마루코마 온천을 담아왔음에도 겨울이면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 예의를 지키길 잘 했다 싶다.
언젠가 이 시기가 지나고 다시 겨울이 오면 눈을 바라보며 온천을 즐기고 싶다.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도는 곳은 일본 소설 <설국 雪國 : 유키구니>의 배경이라는 니가타(新潟)현이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라도 방사능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은 곳이라 과연 죽기 전에 갈 수 있을까 싶긴 하다. 그래도 겨울이면 떠오르는 <설국>의 유명한 문장은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지 않을까 싶다. 그 아름다운 문장에 이끌려 <설국>을 시작하지만 내용이 내 취향이 아닌지라 매번 초반만 읽고 손 놓곤 했었다. 집에 있는 게 가장 좋은 올 겨울엔 <설국>을 끝까지 다 읽으면서 예전 여행들을 추억하며 보내야겠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면 설국(雪國)이었다. 밤의 끝자락은 이미 하얘졌다.'
-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옮긴이 김진욱)
<For Your Information>
웹사이트 (※ 구글 번역을 활용하세요) : www.marukoma.c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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