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2020. 5. 7.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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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봄이 다가올 때 쯤이면, 전남 광양 매화마을의 홍쌍리 청매실 농원에 가고 싶다. 동백처럼 겨우내 빠알간 빛을 발하는 꽃도 있지만, 대부분은 긴 겨울동안 잠들어 있다가 따스한 봄기운이 느껴지면 꽃이나 잎을 피운다. 많은 사람이 봄에 피는 벚꽃을 기다리겠지만, 나는 벚꽃보다 이른 봄에 피는, 언 땅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 봄을 알려주는 매화를 기다리곤 한다. 그런 매화가 백운산 자락을 타고 심겨져 있는 곳, 봄이면 하얀색(백매화), 푸른빛이 감도는 하얀색(청매화), 붉은색(홍매화) 매화가 반기는 곳이 바로 홍쌍리 청매실 농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매화축제 때는 청매실 농원에 가본 적이 없다. 꽃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하얀 꽃보다 검은 머리를 보고 싶지 않아서, 꽃에게 눈인사할 시간도 없이 떠밀리듯 걷기 싫어서, 나는 매번 매화축제를 비켜서 청매실 농원엘 갔다. 그러다보니 흐드러지게 만발한 매화를 본 적이 없다. 지나치게 한발 빨라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운 나무 몇그루만 만나거나, 지나치게 느려서 이미 꽃이 피고 지나간 자리만을 더듬곤 했다.

유일하게 단 한 번, 매화축제가 끝난 뒤에 방문했을 때, 매화꽃이 떨어지지 않은 나무들을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도 활짝 핀 상태는 아니었다. 지나가던 어르신 말에 따르면, 내가 방문하기 일주일 전쯤에, 햇빛을 덜 받는 나무들이 다른 나무들에 비해 뒤늦게 활짝 피어올랐다가 이제 막 져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아란 하늘 아래에 하얗게 핀 매화 꽃을 보니 빈센트 반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Blossom Almond)>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출처 : 반 고흐 미술관(Van Gogh Museum), https://www.vangoghmuseum.nl>

고흐가 머물고 있던 남프랑스에서는 아몬드 꽃이 매화처럼 긴긴 겨울을 이겨내고 가장 빨리 꽃을 피워 봄을 알렸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 그림은 아직 직접 보지 못하고 사진으로만 접했지만, 푸른빛이 도는 민트색 하늘 아래 분홍빛이 묻어난 하얀 아몬드 꽃들은 사진으로만 봐도 참 예쁘다. 당시 유행하던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받아서 그려졌다고 해서인지, 대담한 터치나 나무의 구도를 보면 우리나라 옛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여백의 미가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의 매화를 보며 고흐의 아몬드 꽃이 떠오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꽃의 모양과 색깔뿐만 아니라 구도나 전체적인 분위기 등이 서로 비슷하게 닮아있으니까 말이다. 비록 다른 시대, 다른 장소의 다른 꽃이지만, 그럼에도 반 고흐가 담고자 했던 아름다움이 그 모든 다름을 초월하여 느껴지는 듯 하다.

이 그림은 고흐가 조카에게 선물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고흐가 사랑하는 동생 테오는 1890년 2월에 태어난 아들에게 형의 이름 '빈센트'를 붙여주었고, 고흐는 조카에게 희망찬 봄과 새생명을 상징하는 예쁜 꽃나무 그림을 그려서 선물했다. 그러나 밝은 그림과 달리 이 시기는 고흐의 가장 힘들었던 말년이었고, 결국 반 고흐는 1890년, 그리고 동생 테오도 1891년에 뒤이어 세상을 떠났다. 비록 삼촌과 아버지는 그렇게 일찍 아기 빈센트의 곁을 떠났지만, 아기 빈센트는 그들이 남겨둔 그림들을 잘 간직하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이 생기는데 일조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꽃 피는 아몬드 나무>를 보면 마치 고흐가 조카에게 보내고자 했던 '희망'이라는 선물이 조카의 손을 거쳐 결국 우리에게로 전해진 것만 같다. 그 희망을 안고서 새롭게 봄을 맞이해야겠다고, 다시 한 해를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매화 꽃을 보면서, 아몬드 꽃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다시, 또, 봄이다.

웹사이트 : https://www.vangoghmuseum.nl/en/collection/s0176V1962?v=1

 

Almond Blossom - Van Gogh Museum

Almond Blossom, 1890, Vincent van Gogh, Van Gogh Museum, Amsterda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www.vangoghmuseum.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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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안 Wise 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