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2020. 10. 7.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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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비행기를 탔다.

생각해보면 출장을 자주 다니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전업 여행가도 아니라 비행기는 여행 가기 위해 종종 탔을 뿐이다. 그런데 고작 반년 넘게 비행기를 타지 못 했다고, 마치 당연히 누려야할 혜택을 못 누린 것처럼, 버스나 지하철이 멈춘 듯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다고 비행기를 좋아하느냐, 하면은, 그것도 아니다.

우한 코로나 사태 이전까지 단지 여행지를 가기 위한 가장 빠르거나 편한 교통편으로 비행기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공항에 찾아가서 수속을 하고, 원하는 자리를 예약하기 위해 미리부터 신경쓰고, 불특정 누군가의 옆에 앉아 식사를 해야하고, 다리를 펴거나 몸을 비틀기도 힘든 좁은 자리에서 시간을 보내야하고, 장시간 타면 멀미가 나서 영화를 보지도 못하고 책을 읽지도 못하고 잠을 자지도 못하고 뜬 눈으로 시간이 가기만을 바라야 하는 비행기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가능한한 피하고 싶은 교통 수단이었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은 가장 보편적인 이코노미석 기준이다..^^).

그랬는데, 단 몇개월만에, 고작 제주도까지 한시간도 채 안되는 거리를 날아가는 거였는데, 우한 코로나때문에 기내식도 하나 주지 않고, 갑작스레 결제해서 제값 다 주고 표를 샀는데 비행기는 어쩌다보니 스크린도 없는데도! 비행기가 뭐라고, 공항 가는 길이 설레였다.

나의 첫 비행기 탑승은 제주도를 가기 위해서였다. 어린 시절이라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말로만 듣던 비행기를 처음 탄다는데 며칠동안 꽤 설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일리지 적립을 위해 만들어주었던 알록달록한 어린이 마일리지 카드를 오랫동안 소중하게 간직했다. 안타깝게도 첫 탑승에서 창가 자리는 앉을 수 없었지만, 빠르게 땅을 달리던 비행기가 어느 순간 부웅 오르는 듯 하더니 귀가 멍멍해졌는데,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서 그렇게 멍멍한 상태로 제주도까지 갔다. 착륙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비행기에서 내리고도 귀는 여전히 멍멍해서 옆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심지어 귀가 점점 아파오니까 이대로 귀가 들리지 않을까봐 무서워서 울었었다.

그랬었는데, 처음 비행기로 해외를 간 뒤로 한동안 비행기를 타는 게 즐거웠다. 비행기 안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다보면 나를 내가 잘 모르는 새로운 도시로, 또는 그리웠던 집으로 데려다 준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이 여권과 지갑을 넣은 가방만 들고 덜렁덜렁 탔었는데, 탑승 횟수가 늘어나면서 점점 기내에서 즐길 수 있는 것, 기내에서 꼭 필요한 것들을 챙기다보니 가방은 점점 무거워졌었다. 그리고 나이가 더해진 나는 점점 예민해져서 비행기의 좁은 좌석이 불편해졌고, 기내식이 맛이 없어졌고, 기내에서 잠이 잘 오지 않게 됐고, 없던 멀미가 생겼다. 그렇게 비행기를 타는 시간이 고생스러워졌다.

몇 달만에 비행기를 타자니, 알고 있었으나 오랜 시간 잊혀졌던 비밀의 정원에 발을 딛는 느낌이었다. 귀찮았던 탑승 수속도 반가웠고, 처음 보는 승무원인데 오랜만에 본 친구인양 괜시리 반가웠다. 창 밖으로 비행기가 뜨고 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치 잊고 있었던 첫사랑의 감정이 되살아난 듯 설렜다. 하늘이 흐려도, 비가 와도, 하늘이 맑아도 좋았다. 하늘 위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내가 사는 이 땅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내가 사는 세상이 새삼스럽다. 전체적으로 현재 상황은 답답하지만, 이런 생각을 오랜만에 하게 되서, 이런 감정을 오랜만에 느껴서 감사했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 본 기사에서 목적지 없는 비행기 표를 산 사람들이 생각났다. 나와는 조금 다른 마음이겠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그리고 무언가를 새롭게 시도하고 싶은 마음만은 비슷할 거란 생각이 든다.

지금 이런 순간도 있음을 감사하며, 이런 깨달음도 알게 됐음을 감사하며, 조금만 더 잘 버텨보자.. :-) 

 

※ 관련 기사 : 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9/24/2020092403323.html?utm_source=naver&utm_medium=original&utm_campaign=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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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안 Wise I's